백제 최고(最古)의 가람, 대통사터

작성자 | 서정석 교수(공주대학교)
작성일 | 2015-06-28
조회수 | 5730 [kakaostory2]

 

 

△ 고도육성아카데미 회원들이 반죽동에 있는 세워진 대통사지 당간지주 앞에서 서정석 교수로부터 대통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백제 최고(最古)의 사찰 대통사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공주시내 한가운데에는 대통사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통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丁未)에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웅천주(熊川州)에 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통사라 하였다(웅천(熊川)은 곧 공주(公州)이니 당시는 신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정미년(丁未年)은 아닐터이고, 중대통(中大通) 원년 기유년(己酉年)에 세웠을 것이다. 흥륜사(興輪寺)를 세우던 정미년에는 다른 고을에까지 절을 세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대통사가 백제 성왕 5년(527)에 공주에 세워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온 것이 384년이고, 그 이듬 해에 한산(漢山)에 절을 지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통사야말로 위치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백제 사찰인 셈이다.

△대통사지에 있었던 백제시대 석조로 원래 금당지와 강당지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공주 중동 석조와 본래 쌍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 야외전시실에 전시중이다.

 

 

 

△대통사지에 있었던 백제시대 석조로 원래 금당지와 강당지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공주 중동 석조와 본래 쌍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 야외전시실에 전시중이다.

‘대통(大通)’명 기와, 당간지주, 석조

대통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 때 반죽동 일대에서 ‘대통(大通)’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그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반죽동 일대가 그곳이다. 그곳에는 지금도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거니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커다란 돌 물받이(石槽) 두 개도 그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다 알다시피 그 주변에는 얼마 전까지도 ‘대통다리(大通橋)’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대통사와 관련된 유물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반죽동 일대에 대통사가 있었다고 한다면 공주시내에서 가장 좋은 곳 중 한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성왕이 이렇게 공주시내의 제일 좋은 곳에 대통사를 세운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을 중심으로 국민 통합과 강력한 백제를 꿈꾸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 반죽동 301번지에 세워져 있는 대통사지 당간지주

대통사를 꿈꾸며

일찍이 반죽동 301번지에 세워진 당간지주(보물 제150호)를 중심으로 한 그 일대에서 대통사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자 현지를 답사한 輕部慈恩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유물 유적을 기준으로 대통사지의 가람배치도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대부고에서 ‘대통다리’로 이어지는 도로의 남쪽에 대통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앞서 말한 돌 물받이(石槽)도 그곳에 있었고, 건물터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그곳이었다. 그래서 그 주변을 발굴조사해 보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 탑이나 금당, 강당과 같은 대통사터를 확정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백제 최고(最古)의 사찰을 맞이할 정성이 부족하다는 꾸짖음일까, 아니면 십 년만에 부여로 훌쩍 떠나간 성왕에 대한 원망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일까. 백제가 그렇듯이 대통사 역시 실루엣만 남긴 채 기다리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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