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천, ‘생태’를 넘어서

작성자 | 윤용혁 공주대 교수
작성일 | 2015-05-26 01:39:26
조회수 | 3506 [kakaostory2]

제민천, ‘생태’를 넘어서

70년 전 제민천의 추억을 정리한 소노다(園田) 씨의 글을 번역하여 요즘 신문에 게재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제민천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게 되었다. 소년 소노다의 제민천은 모래톱 정결한 물에 바글거리는 물고기를 잡곤 하였던 추억의 강이었다.

고도(古都)의 일부인 제민천

사실 제민천은 고도 공주의 젖줄이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드넓은 서울 도심의 청계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금의 제민천은 엿가락처럼 한 줄기, 직선의 도막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동맥에 정맥과 실핏줄이 깔린 것처럼 지천이 쫙 깔렸을 것이다. 그래서 공주의 도시 역사는 제민천 개발의 역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대지 면적이 많지 않은 공주의 구도심에서 지천을 정리하고 둑을 쌓고 매립하는 작업을 통하여 비로소 도시가 들어설 공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공주에 도읍했던 초기인 491년 여름 6월, 금강물이 불어 왕도의 도심이 물에 잠겼다. 집 2백 여 채가 큰 피해를 입었다. 금강물이 불어 제민천으로 역류하여 시내를 완전 침수시킨 것이다. 다시 497년 여름 6월에 큰 비가 내려 시내의 집들이 다시 잠겼다. 이 같은 왕도 공주의 수재는 제민천에 대한 치수 작업이 미비한 상태에서의 사정이었다. 제민천에 대한 치수, 그것은 백제시대 도시 공주의 가장 큰 과제였던 것이다.

498년 동성왕대에 ‘웅진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가설되었다. 혹자는 이를 금강에 가설한 다리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민천의 치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점에서 금강에 다리를 가설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웅진교’는 바로 제민천을 가로지르는 도심의 다리였으며, 이것은 공주의 도시 정비작업의 진행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웅진교’가 뒤의 대통교 정도에 해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그 일대는 필시 백제시대에 토목사업과 건축사업이 크게 이루어졌던 현장일 것이다.

홍수가 날 때마다 제민천은 제방을 다시 쌓거나 보수하고 다리를 새로 가설해야만 했다. 지금은 공산성 서문 앞에 옮겨진 제민천교 비석도 그러한 제민천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2백년 전인 1817년 여름, 큰비가 억수로 내려 다리는 무너지고 제민천은 절단이 나고 말았다. 3천 여금의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었는데,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둑을 수리하고 다리를 새로 놓을 수 있었다.

그 산고(産苦)를 적은 것이 ‘제민천교 영세비’라는 비석이다.

역사문화의 옷을 입히자

지금, 제민천은 대대적으로 정비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주변 환경을 청결하게 하고 생태하천을 복원함으로써 도시 공주의 면모를 새롭게 하려는 회심의 사업이다.

그러나 제민천이 고도 공주의 일부라는 점에서 구 도심의 핵심을 차지하는 제민천의 정비도 역사와 문화의 옷을 입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제민천 역시 고도 공주의 일부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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