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九?(두곡) 통일론(이삼평과 두곡 통일론)

작성자 | 시정담당관
작성일 | 2015-05-26 01:39:26
조회수 | 3303 [kakaostory2]

1. 서 언 (이풍용)

九九 두곡 통일론을 이해하기 위 하여는 세종 특별자치시의 탄생의 역사 섭리적면을 검토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세종시의 공식 명칭은 세종 특별 자치시이다. 발전과정에서 행정복합도시(약칭 행복도시)로 불리어지다가 세종 특별자치시로 행정명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역사 섭리적 배경을 가지고 세종시가 탄생되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연계하여 이를 토대로 우리의 통일 문제-九九 (두곡)統一즉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이유를 천명하고, 또 새 만년 인류역사에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도 아울러 검토 할 것이다.

2. 이성계의 조선 창건

1392년 고려 500년을 이어 이성계는 조선을 창건하였다. 그후 1393년에 도읍지 문제를 계룡()으로 택하여 10개월간 궁터 공사 까지 하였으나,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의 주장에 의하여 1934년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첫째-계룡은 개경으로부터 너무 거리가 멀고, 둘째- 강이 없어 경세에 어렵다. 셋째-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기 때문에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라고 그들은 주장한 것이다.

역성혁명을 주도했던 이들로서는 당연한 발상이며 또한 탁견아라 하자 않을 수 없다.

그러함에도 계룡()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어 민족의 선각자들은 개경에서 뿌리내리어, 한양 600년 꽃을 피우고, 그 결실은 계룡 800년이라는 예언을 남겨 오늘날까지 우리민족의 정신세계 속에 각인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말하면 계룡산의 靈氣때문이다 영기란 응집된 우주 에너지를 말하는데 계룡산이 靈氣最大力形成 된 곳이다. 고로 이 계룡산이 앞으로 만년 인류역사의 새로운 시원지가 될 것이다.

필자는 만년인류 역사주기설을 주장한다. 또 굳게 믿고 있다. 역사는 필연이고 순간과 찰라는 운명이며 이 운명인 찰라와 순간이 흐르고 나면 숙명이 되어 이를 역사라 말하고, 역사는 진리(불변 )인 것이다.

흐르는 찰라와 순간을 말 타듯 흐름을 타는 존재가 인간이어서 역사의 주체는 인간인 것이다. 즉 우리(宇理)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답게 산다는 것은 우리에 순명하며 홍익인간 화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

금년이 한기(桓記) 9711년이다. 280 여년이 지나면 새로운 만년 인류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이 서광이 계룡산으로부터 발하고 있고 세종특별자치시는 이러한 역사섭리적 배경으로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혹자는 궤변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필자는 이런 사람돌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전하곤 한다.

多辯 言也(다변묵언야) 默中言有心 有心天地心也(유심천지심야)

다변이 묵언이다. 묵언가운데 한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땅 마음이다

.세종시의 틴생을 두고 MB정권이 정운찬을 앞세워 통일되면 다시 수도를 옮겨야 한다며 설왕설래 할 때 펼자는 종묘공원에 세워져있는 정도전의 進新都八景詩碑(진신도팔경시비)앞에 이침 일찍 나아가 그 시를 默頌(묵송)하고 또 (묵상) 하기를 6개월간 하였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감기로 미열과 두통이 있었다.

그래도 종묘시비 앞에 나아가 묵상하기를 결 할 수는 없었다. 세종시에 대하여 절세의 경세가 정도전에게 답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도중에 현기증이 나서 시비 옆 벤치에 누우려는 순간 전광석화가 내 머릿속을 강타하여 왔다. 그리고 환청이 들려왔다. ‘한양 600년을 지키기 위하여 수도를 옮겨야 한다. 분명 정도전의 소리였다.

3. 일본인들의 계룡산에 대한 집착

임진왜란(1592~1597)

1588년 선조21년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중 겐쇼로 하여금 조선에 잠입하여 방방곡곡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후 1592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때에 일본에 끌려가 일본백자 시조가 된 이삼평 도공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1917년에 군국주의 사관에 기초한 이삼평 도공의 현창비를 아리타 연화석산에 세웠다.

그 비문에 우리 도조 이삼평은 조선 충청도 금강 사람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를 세울 때 관여했던 나카지마히로키(中道浩氣)19년 후인 1938년에 저술한 비전도자사고에는 이삼평공은 충청도 금강 계룡 사림이다라고 기술하여 계룡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나카지마히로키가 직접 계룡산을 답사한 후에 돌아가 책을 쓴 것이 틀임없다. 그리고 계룡산이 靈山임을 깨닫고 간것이다

이토히로부미의 계룡산 집착

이토히로부미는 1908314太田大田으로 개명토록 하였다. 1년 후 1909113일 순종황제를 따라 태전에 왔을 때 산수풍광이 웅대하고 수려한 것을 보고 재삼 대전으로 개청하라고 했다. 그리고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대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조선대전발진지-1917, 충남도 발전사-1932), (결국 도청은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

이토히로부미는(大字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다. 는 생명에너지의 무한발전을 상징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글자이고 아라는 훈을 가진 자이다. 는 완성종결을 의미하는 글자다)이토히로부미는 대전보다는 계룡산에 관심이 더 있었던 것이다. 즉 대동아공영권 지휘본부를 계룡산에 두려는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또히로부미는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만약 이토히로부미가 제거되지 않았다면 계롱산에 침략적 동양평화론자의 대동아공영권 지휘본부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이 의거는 안중근 의사의 3국 공존평화론(한국,중국,일본) 三鼎평화론의 승리인 것이다. 또한 안종근 의사의 三鼎평화론은 셰계일원국가 탄생의 조짐을 알리는 배아(胚芽)인 것이다.

일본은 또 1911년에 계룡산 천왕봉을 천황봉으로 고쳐 부르도록하여 일본 천황을 이미지화 시켰다. 이와 같이 창지, 창씨개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大安門大漢門으로 현판을 고쳐 달도록 하였다.

(200796만에 천황봉은 천왕봉으로 복귀)

1948년 미군이 계룡산에 통신대 건설을 시도했으나 거듭 실패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결국 한국군이 건설하였다. 왜 실패했을까?

4. 박정희 대통령의 수도이전 계획

19781월 박정희 대통령 수도이전 계획(백지프로젝트)을 하였으나 19791026알 정체불명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중단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한민족의 백년대계가 일시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5. 일본의 우경화

오늘의 일본은 이토히로부미의 망령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이망령은 다시 계룡산을 탐하려 할 것이다. 19907월 공주 동학사 입구 박정자 조각공원에 건너가로 된 이삼평의 기념비를 일본의 군국주의 시관이 밑 바탕이 된 1917년 일본 아리타에 세워진 이삼평 현창비를 그대로 윤색하여 세워놓고 일본인 후세들을 위한 군국주의 역사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삼평공이 조국을 배신한 원혼으로 계룡산의 안산격인 박정자 조각공원에 환혼 한것은 자신의 해원은 물론 21세기 일본 군국주의 부할을 경계하여 한다는 역사 섭리적 의미가 있는것이다. 우리는 이를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일본의 국국주의 부할은 우리의 평화 통일의 걸림돌 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이런 인식하에 왜곡된 이삼평 기념비를 바로 잡는데 심혈을 기우렸던 것이다

이를 바르게 고처 놓는데 20여년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7m 철근 세면 콩크리트 조형물에 오석으로 -일본도조 이삼평공기념비-라 새기어 붙임을 하였다. 철근을 넣어 만든 위령비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명산인 계룡산의 영기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곳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계룡산의 안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의 속내를 예의주시하여야 한다. 계롱산의 영기가 뻗어 오르는 한 일본이 한국(통일된 힌국)을 넘나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400년 전 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세종시 정책이 잘못 차잘이 생기면 일본은 이를 노리고 백제문화의 터전을 일본문화의 터전으로 바꾸어 놓으려 할 것이다.

21세기는 문화경쟁의 시대이다. 세종시 건설계획 초기에 세종시에 관한 세계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일본의 모 학자는 풍수지리의 과학적 접근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일본이 세종 특별 자치시를 풍수학적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하여 준다.

6. 결어(통일)

위에서 세종특별자치시의 탄생을 역사 섭리적 면에서 살펴보았다. 우리의 주변국돌이 왜 그렇게 집요하게 게롱 산과 게룡(세종) 시에 집착하는 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렇게 탄생된 계룡(세종) 시를 우리는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우리(宇理) (우주의本理,섭리)임을 깨닫고 복례(復禮)로 우리(宇理)로 거듭 나야 한다.

그리고 민족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우리(宇理)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宇理)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국(宇理國)이라 해야 평화통일이 가능해진다. 이제는 우리나라(宇理國家)를 남북분단국(南北分斷國)이라 해서는 안된다. 남북 분리국(南北 分理國)이라고 말해야 된다. 그래야 九九 (두곡)통일 즉 평화통일이 이루어 질수 있다.

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두곡) 를 한님(하느님)께 올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이것이 4백년 전에 조국을 베신하였다는 원혼으로 1990년 계룡산에 환혼한 이삼평도공이 전하는 메세지 인것이다

민족의 진정한 광복은 남북 통일이 이룩 되는 날 비로서 구현 되는 것이다

(自註)九九 (두곡)통일아라는개념의 九九 는 우주삼라만상의 발전섭리를 수리철학으로 설명해 놓은 천부경에서 원용한 것이다. 成數(성수)-九九生數 一二三四와 중앙수 가 화합하여 成數가 된 것이다. 九九 수 다음은 새로은 차원의 단계로 진화 발전하게 된다. 즉 신태극(新太極)이 시작된다. 이 신태극( 新太極)의 생명에너지는 순리(順理)애 의하여 분합(分合)이 이루어져 무한생성 발전한다. 순리(順理)로 남북이 분리(分理)된 것이 九九를 이루니 새로은 태극의 생명이 진회될 것이다. 아것이 통일이며 순리에 의하므로 평화통일이라는 개념이 스스로 도출되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니고 팥심은데 팥 난다.’는 우리의 속언이 이를 잘 대변한다. 豆字(두자)는 콩이라는 의미 이외 또 天祭(천제)에 제물을 진열 할 때 사용하는 祭器(제기)의 의미도 있다, 이를 부연하면 ;’은 제기위에 잘 차려놓은 祭需(제수)를 뜻하는 象形文字(상형문자)인 것이다.

이 풍용

1938년 천안

한의사, 철학박사, 시인

독도한의원 원장

독도 홍익인간 문화창조추진 사아버연합 대표

九九 (두곡) 통일론 주창

독도 칙령 기념사업 국민연합 공동대표

명예 독립운동가 모임 대표

일본도조 이삼평공 제전위원회 한국측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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